달을 쏘다 - 윤동주
[시시(詩時)]한 인생달을 쏘다
윤동주
... ...
아이처럼 황황해지는 가슴에 눈을 치떠서 밖을 내다보니 가을 하늘은 역시 맑고 우거진 송림은 한 폭의 묵화다.
달빛은 솔가지에 쏟아져 바람인양 솨- 소리가 날 듯하다. 들리는 것은 시계 소리와 숨소리와 귀또리 울음뿐 벅쩍대던 기숙사도 절간보다 더 한층 고요한 것이 아니냐? 나는 깊은 사념에 잠기우기 한창이다.
딴은 사랑스런 아가씨를 사유(私有)할 수 있는 아름다운 상화(想華)도 좋고, 어릴 적 미련을 두고 온 고향에의 향수도 좋거니와 그보담 손쉽게 표현 못할 심각한 그 무엇이 있다.
바다를 건너 온 H 군의 편지 사연을 곰곰 생각할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이란 미묘한 것이다. 감상적인 그에게도 필연코 가을은 왔나 보다.
편지는 너무나 지나치지 않았던가, 그 중 한 토막,
'군아, 나는 지금 울며울며 이 글을 쓴다.
이 밤도 달이 뜨고, 바람이 불고, 인간인 까닥에 가을이란 흙냄새도 안다.
정의 눈물, 따뜻한 예술학도였던 정의 눈물, 오 이 밤이 마지막이다.'
또 마지막 켠으로 이런 구절이 있다.
'당신은 나를 영원히 쫓아 버리는 것이 정직할 것이오.'
나는 이 글의 뉘앙스를 해득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나는 그에게 아픈 소리 한 마디 한 일이 없고 서러운 글 한 쪽 보낸 일이 없지 아니한가. 생각컨대 이 죄는 다만 가을에게 지워 보낼 수밖에 없다.
홍안서생 (紅顔書生)으로 이런 단안을 내리는 것은 외람한 일이나 동무란 한낱 괴로운 존재요, 우정이란 진정코 위태로운 잔에 떠 놓은 물이다. 이 말을 반대할 자 누구랴.
그러나 자기 하나 얻기 힘든다 하거늘 알뜰한 동무 하나 잃어버린다는 것이 살을 베어 내는 아픔이다.
나는 나를 정원에서 발견하고 창을 넘어 나왔다든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든가 왜 나왔느냐
하는 어리석은 생각에 두뇌를 괴롭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만 귀뚜라미 울음에도 수줍어지는 코스모스 앞에 그윽이 서서 달터 삐링스의 동상 그림자처럼 슬퍼지면 그만이다.
나는 이 마음을 아무에게나 전가시킬 심보는 없다.
옷깃은 민감이어서 달빛에도 싸늘히 추워지고 가을 이슬이란 선득선득하여서 서러운 사나이의 눈물인 것이다. 발걸음은 몸뚱이를 옮겨 못가에 세워 줄 때 못 속에도 역시 가을이 있고, 삼경(三更)이 있고, 나무가 있고, 달이 있다.
그 찰나, 가을이 원망스럽고 달이 미워진다.
더듬어 돌을 찾아 달을 향하여 죽어라고 팔매질을 하였다.
통쾌! 달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놀랐던 물결이 잦아들 때 오래잖아 달은 도로 살아난 것이 아니냐,
문득 하늘을 쳐다보니 얄미운 달은 머리 위에서 빈정대는 것을.....
나는 곳곳한 나뭇가지를 고나 띠를 째서 줄을 메워 훌륭한 활을 만들었다.
그리고 좀 탄탄한 갈대로 화살을 삼아 무사(武士)의 마음을 먹고 달을 쏘다.
저작 : 1938년 ( 22 연전#1/4 ) 10월
발표 : 1939년 ( 23 연전#2/4 ) 01월 < 조선일보 > 학생란
발표 : 1949년 ( 33... 4주기 ) 7월 8일 < 학풍學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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