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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팡이 하나 - 고한승
  2. 율정기(栗亭記) - 계용묵
  3. 고향의 창공 - 강경애
  4. 추의(秋意) - 박용철

지팡이 하나 - 고한승

[시시(詩時)]한 인생

지팡이 하나

 

                                                                       고한승


옛날에 우리나라 유명한 양반으로 팔도어사를 지냈던 박문수란 분이 있었
습니다. 그분이 조선팔도를 돌아다니면서 별별 기괴한 일을 많이 당하였는
데 그중에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지요.


하루는 어느 시골 길을 혼자서 터벅 걸어가다보니까 저쪽에 어떤 사람 하
나가 헐떡거리고 옵니다.
그러더니 그 사람이 박문수 박어사를 보고
“내 뒤에 도적놈이 칼을 들고 쫓아오니 나를 좀 숨겨주십시오.”
하고는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길가에 있는 보리밭 속으로 들어가 숨어버렸
습니다.
도량도 넓고 꾀도 많은 박어사라도 창졸(倉卒) 간에 이러한 일을 당하니
까 어떻게 할지 앞이 캄캄하였던 모양이었습니다.


그러더니 미처 생각도 못해서 저편 고개 너머로 과연 흉악하게 생긴 도적
놈이 시퍼런 칼을 들고 쫓아옵니다.‘아- 이것 큰일났다’하고 생각하는 사
이에 벌써 도적이 앞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상기된 눈을 두리번하면서
‘너 이리로 사람 하나 지나간 것 못 보았느냐?’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박어사는 어쩔 줄 모르다가 얼른 대답한다는 것이‘못 보았습니다’하였
습니다.
도적놈은 눈을 크게 뜨면서‘이놈 못 보다니. 길이 이것 한 갈래밖에 없
는데 못 봐! 네가 그놈을 숨겼구나. 바로 대지 않으면 너부터 죽인다’하고
는 칼을 들어 단번에 찌를 것같이 으르렁댔습니다.


자- 큰일났습니다. 모른다고 하면 자기가 죽을 모양이고 가르쳐주면 그
사람이 죽을 모양이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합니까? 그렇다고 도적과 대항하여
싸우자니 자기의 손에는 지팡이 하나뿐이고 도적은 시퍼런 칼을 들고 있지
않습니까? 더욱이 자기는 임금님의 명령을 받아 팔도로 순회하여 민정을 보
살피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책임을 진 어사의 몸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
이 손을 들어 보리밭을 가리켜주고는 그대로 도망을 하였습니다. 물론 보리
밭 속에 숨었던 사람은 무지한 도적의 손에 죽었을 것입니다.


그날 밤에 박문수 박어사는 어떠한 글방을 찾아가서 하룻밤을 새게 되었
습니다. 글방에는 나이가 열두어 서너 살쯤 된 어린 사람들이 십여 명이서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박어사는 글방에서 저녁을 얻어먹고 윗목에 가서 곤
한 다리를 쉬느라 드러누웠습니다. 온종일 걸어서 몸이 피곤하여 한잠을 곤
하게 자려고 하였으나 아까 낮에 자기의 어리석음으로 보리밭 속에서 죽은
그 사람의 일을 생각하니 잠이 도무지 올 리가 있습니까?


자기는 어사의 몸으로 고생하는 백성을 살려주어야 할 사람이어늘 애매한
사람을 죽게 하였구나! 어떻게 하면 그 사람도 살리고 나도 살았을까? 이러
한 생각을 하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고 있는데, 마침 그때 글방 선생님
이 동네로 놀러나가는 모양이었습니다. 자- 선생이 나가니까 여러 글 읽는
학도들이 책을 일제히 척 덮어놓고는“놀자!" 하고 일어섰습니다.


그랬더니 그중에 한 학도가 하는 말이 “얘 오늘은 원님놀음을 하자!”
하니까 여러 소년들이“그래 그것 좋다”하더니 그중에 제일 똑똑해 보이는
소년을 원님으로 정해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원님으로 천거된 소년이 아주 점잖은 목소리로 누구는 이방을
내고 누구는 통인을 내고 누구는 사령을 내고- 이렇게 차례와 분부를 하여
놉니다. 그리고 원님행차하신다고‘이럭거라 물렀거라’하면서 안방에서 마
루로 마루에서 윗방으로 돌아다닙니다.
박문수 박어사는 윗목에 누웠다가 하도 우습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여
‘어디 어떻게 뭘 하나 꼴을 좀 보자’하고 자는 체하고 코를 드르렁 골았
습니다.


그랬더니 원님행차가 앞으로 지나가다 말고 우뚝 서서 원님이 이방을 불
러 호령을 합니다. 원님행차가 지나가시는데 웬 사람이 코를 골고 누웠단
말이냐? 빨리 잡아오너라. 하니까 이방과 사령이 일제히 대답을 하고는 박
어사를 잡아 일으킵니다.
여러분! 장난으로 원님놀음을 하는데 아무리 거지같이 차리고 다니는 사
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어른이 아닙니까? 그리고 이 글방에도 손님으로 들어
와서 자는 중입니다. 그런데 어른이요 손님인 박어사를 자기네의 장난놀음
에 버릇없는 놈이라고 잡아가는 그들의 의기와 기운이 어떠합니까? 자- 잡
혀갈 박어사도 가만히 생각을 하니까 참말 그 소년들의 마음과 뱃심이 꽤
크더란 말이지요. 그래서 어찌하나 볼 양으로 잠자코 잡혀갔습니다.


박어사의 무릎을 꿇어놓고 원님은 높은 데 올라앉아서 일장호령을 내립니
다. 열두어 살쯤 된 소년이 앉아서 점잖은 어른에게 호령을 하니 참말 우스
운 장난이었습니다. 그러나 박어사도 원래 마음이 큰 분이라 잠자코 앉아서
“제발 잘못하였으니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하고 빌었습니다. 그러니까
원님이 노여움이 겨우 풀려 “네가 처음이요 또 법을 모르는 무식한 자기로
이번만은 용서하여주겠으니 이후에는 각별히 조심을 하여라”합니다.
박어사는“네, 그저 감사합니다”하고 절을 꾸벅 하고는 가만히 생각하기
를‘이 소년들이 이같이 영리하고 도량이 크니 반드시 이다음에 큰 사람이
되리라’하고 오늘 당한 일을 한번 물어보았습니다.


“어떤 길 가는 사람이 이러이러하여 그 사람을 죽게 하였으니 어떻게 하
면 두 사람이 다- 살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박문수 박어사가 아직까지 생각하고 생각하되 종시 생각이 나
지 않는 이 문제로 물어본 것이었습니다.
원님이 가만히 팔짱끼고 한참 생각하더니
“예끼! 못난 사람! 그것을 못 살려!”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아-니 길을 가는 사람이니 지팡이를 짚었겠지?”
“네- 지팡이야 가졌지요. 그러나 도적은 칼을 가졌으니 어떻게 대항합니
까!”


그 소년이 깔깔 웃으면서
“하하 저런 못난 사람 좀 봐! 지팡이를 가졌으면 장님 노릇을 하고 가지
못해?”

하였습니다.


어떻습니까? 과연 지팡이를 짚고 장님 노릇을 하고 갔으면 아무도 지나간
사람을 못 보았다고 할 수가 있었지요.
박문수는 무릎을 탁! 치고 참말 절을 한번 하였습니다.
팔도 도어사로 이름 높고 꾀와 재주가 많은 박문수란 분도 이름 모르는
소년 앞에서 비로소 참 마음으로 감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영리한 소년은
물론 박어사가 잘 출세를 시켜서 훌륭한 인물이 되었겠지요.


-《어린이》제3권 제9호, 1925.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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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정기(栗亭記) - 계용묵

[시시(詩時)]한 인생

율정기(栗亭記)

                                                                                 계용묵


인제 버들잎이 완전히 푸르른 걸 보니 밤나무 잎에도 살이 한참 오르고
있을 것 같다.
버들 뒤에 잎이 푸르른 나무가 하필 밤나무뿐이랴만 버들잎이 푸르면 나
는 내 고향집 정원의 그 늙은 밤나무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그것은 몇 백 년이나 되었는지 팔순의 노인네들까지 자기의 어렸을 시절
에도 역시 그저 지금이나 다름없는 모양으로 그렇더라고 하는, 언제 어느
때에 심어졌는지 그 유래조차 알 수 없는 그러한 연령을 가진 밤나무다.
어떠한 나무든지 아름드리로 굵게 되면 그 보이는 품이 사람으로 비해 보
면 많은 수양에 단련이 된 그러한 학자같이 침착하고 장중한 맛이 있어 보
이거니와, 이 밤나무야말로 사상이 일관된 철학자같이 숭엄하게, 무겁게,
그리고 거룩하게 보였다.


주위에 둘러선 백양이라든가 솔 같은 것은 바람이 부는 듯만 해도 바람
좇아 몸을 부지할 줄 모르건만 유독 이 밤나무만은 고삭고 무지러진 가지일
래 의연히 서서 그 자세를 변치 않는다.
척 보면 이젠 아주 생명이 다한 것 같이 속속들이 좀이 파먹어 들어가 껍
데기 안으로 겨우 한 치 두께의 살밖에 붙어 있지 않지만 그래도 버들잎이
푸르면 잊는 법이 없이 뒤이어 잎을 피우고, 가을이면 기어이 열매를 맺어
굽알을 떨웠다.
이것은 마치 그 속속들이 구새 먹어 썩어진 등덜미가 이러한 도를 닦기까
지 얼마나한 세고의 풍상에 부대끼며 속을 썩인 그 자취인가를 우리에게 보
여 주는 것 같아, 그 밤나무를 대할 때마다 나는 무엇엔지의 사색에 저도
모르게 머리가 숙군했다. 어쩐지 나는 그것이 좋았다. 그것이 좋아서 조석
으로 이 밤나무 그늘 아래를 거니는 것이 남 모르는 내 한동안의 즐거움이
었다.


조부님도 내 마음과 같았던지 항상 이 밤나무 밑을 떠나지 못하시고 나와
같이 그 그늘 아래 거닐기를 즐기셨다. 그러다가 요 바로 몇해 전에는 해마
다 그 가지가 고삭고 축나는 이 늙은 철학자를 보호하여 그로부터 영원한
벗을 삼으시려 돈을 들여 가며 인부를 사서는 북을 돋우어 주고, 그리고 그
둘레론 돌을 때려 대를 쌓고 정자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는 과객조차도
그 아래 머물러 같이 즐기게 하기 위하여 자연석을 주어다가 곳곳에 좌석을
만들어 놓고 이 늙은 철학자를 주위로 돌아가며 장미라, 목단이라, 매화라,
이런 향기 높은 꽃나무까지 구해다 심어서 정자로서의 정취를 한층 더하게
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이 나로 하여금 이 늙은 철학자와 좀더 친할 수 있게 하
는 원인이 되었거니와, 사람들은 이것을 율정이라 이름 짓고 여가(餘暇)가
있으면 이 철학자를 찾아 모여 와서 고풍한 그 정취 속에 잔을 기울여 가며
시를 읊었다. 내 그 시를 지금 일일이 기억 못 하거니와 그 지방 일대는 물
론, 남북관(南北關)으로부터서까지 모여든 시문이 실로 기백 수(幾百首)로
조부님도 지금은 그것을 노여(老餘)의 보배로 제책(製冊)까지 하여 머리맡
에 두시고 그 시문 속에 구원한 진리가 담긴 듯이, 그리하여 그것을 찾으시
려는 듯이 짬짬이 읊으심으로 심신의 위로를 삼아 오신다.


내 창작도 태반(殆半)은 여기서 되었다. 직접 이 철학자를 두고 짜여진
것은 아직 한 편도 없으나, 이 철학자와 벗하여 상이 닦였던 것만은 사실이
다. 상(想)이 막히어 붓대가 내키지 않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책상을 떠
나 이 철학자의 그늘 밑으로 나왔다. 그리하여 그 밑에서 고요히 눈을 감고
뒷짐을 지고 거닐면서 매듭진 상을 골라서 풀곤 했다. 생각이 옹색해도 이
그늘을 찾았고 독서와 붓놀음에 지친 피로가 몸에 마칠 때에도 이 그늘을
찾았다. 실로 이 늙은 철학자 밤나무는 나에게 있어 내 생명의 씨를 밝혀
주는 씨앗터였다.


이러한 씨앗터를 내 이제 떠나 살게 되니 해마다 버들잎에 기름이지면 이
늙은 철학자의 그늘 밑이 더할 수 없이 그리워진다. 인제 그 밤나무에도 잎
이 아마 푸르렀겠지. 비바람에 고삭은 가지들은 어떻게 됐을까 그 안부가
지극히 알고 싶어지고, 그 밑에서 고요히 눈을 감고 사색에 잠겨 보고 싶어
진다.


더욱이 생각의 가난에 원고를 자꾸만 찢게 될 땐, 어쩐지 그 그늘 밑 자
연석 위에 잠깐만 앉아 눈을 감아 보아도 매듭진 상의 눈앞은 훤히 트여질
것만 같게 그 품속이 생각난다.
얼마나 나는 그 품속에 그렇게 주렸든지, 바로 며칠 전 그때가 아마 밤
열시는 넘었으리라, 역시 그 밤에도 나는 기한이 박두한 원고와 씨름을 하
다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어서 이런 때이면 언제나 하던 버릇 그대로 이
미 쓰인 몇 장의 원고를 사정조차 없이 왈왈 찢어 쓰레기통에 동댕이를 치
고 대문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나 일단 발이 멎고 보았을 때 그것은 가지리라고 믿었던 그 철학자의
품속이 아니었고 대문 밖이자 행길인 냉천정(冷泉町)도 한 꼭대기 돌층대
위임을 알았다. 그적에야 비로소 나는 내 몸이 서울에 있는 몸임을 또한 깨
달을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 순간, 갈 곳을 모르는 나는 어처구니도 없이 한동안을 그대
로 멍하니 서서 쓴웃음을 삼키고, 아까 낮에 일터에서 돌아올 때 복덕방 영
감이 돌층대 아래 죽어 가는 한 그루의 포플러 그늘을 지고 담배를 한가히
빨고 앉았던 것을 문득 생각하고 거기라도 좀 앉아서 생각을 더듬어 보리라
포플러 그늘을 찾아 내려갔다.


그러나 낮에 있던 그 나무 판쪽의 기다란 의자는 거기에 있지 않았다. 그
대로 두면 그것도 잃어버릴 염려가 있어 영감은 필시 가지고 들어간 모양이
다. 그러니 그 행길 가에 그대로 우뚝 서 있을 맛이 없다. 그것보다도 나는
지금 마음을 가라앉힐 시원하고도 고요한 자리를 찾는 것이다. 이 근처엔
어디 그만한 곳이 없을까, 담배를 한 대 피어 물고 뒷짐을 지고 연희장(延
禧莊)으로 넘은 산탁 길을 추어 올랐다. 그러나 거기도 역시 마음을 놓고
앉았을 만한 곳이 없다. 산이라고는 하나 사람의 발부리에 지지리 밟히어
돋아나다 죽은 풀밭 위에는 먼지만이 보얗게 쌓여 조금도 신선한 맛이 없
다. 밑도 대여 볼 생념이 없어 다시 집으로 내려와 옷을 갈아입었다. 내 다
방에 취미를 모르거니와 이러한 경우엔 싫더라도 서울선 다방이란 곳밖에
찾을 데가 없는 것이다.


다방에도 제법 그 우리 고향 집 정원의 주인공 늙은 철학자와 같이 구새
가 먹은 모양으로 흉내를 내어 꾸며서 분에다 심어 놓은 마치 애들의 장난
감 같은 나무가 있기는 있다.
그러나 그것의 그늘 밑에서는 한동안의 마음을 가라앉히기커녕, 그리하여
사색에의 힘을 얻기커녕 인위적으로 자연을 모독하여 순진한 사람의 눈을
속이려는 그것에 도리어 불쾌를 느끼게 되는 것밖에 없다. 그리고 현대의
권태가 담배연기와 같이 자욱이 떠도는 그 분위기 속에 숨 막히는 답답함이
도리어 정신을 흐려 놓아 줄 뿐이다.


하지만 잠지나마 다리를 쉬자면 역시 그러한 다방밖에 어디 밑 붙일 휴식
처가 없으니 인위적인 철봉으로 생나무를 지지여 놓고 자연을 비웃으려는
그 분에 심은 나무와 억지로라도 벗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하면 그리하여
그 나무를 무시로 대하고 바라보며 인생을 생각해야 되는 것인가 하면 내
자신의 마음까지도 그 나무와 같이 철봉에 지지워드는 것 같아 그러지 않아
도 속인으로서의 고민이 큰데 자꾸만 인위적인 속인의 속인으로 현대화되어
가는 것 같은 자신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 늙은 철학자 밤나무의 자연 속에
생각을 깃들여 자연 그대로 살고 싶은 욕망이 전에보다도 더 한층 간절하
다.


나 떠난 이후에 이 늙은 철학자는 누구와 더불어 뜻을 바꿈으로 마음을
치는지, 조부님 좇아 이젠 연로에 자유롭게 이 철학자와 벗을 하실 기력이
근심되는데…….


〔발표지〕《조선일보》(1939. 5.)
〔수록단행본〕*『상아탑』(우생출판사,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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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창공 - 강경애

[시시(詩時)]한 인생

고향의 창공(蒼空)

  

                                                                                 강경애


내 고향을 떠난 지 벌써 3년이 잡힌다. 그 동안 고향에는 많은 변동이 생
겼을 것이다. 시가지가 좀더 번화했을 것이라든지 사릿골[四里洞[사리동]],
오릿골[五里洞[오리동]]에 빈민이 그 수를 더했을 것이라든지…… 더구나
이웃에서 주소로 대하던 맘 좋던 할머님들이며, 자루 같은 젖통을 휘두르면
서 입에 침기가 없이 아기자랑으로만 일을 삼는 젊은 부인들이며, 아리랑타
령을 제법 멋들게 부르며 우리집 앞으로 지나다니던 나무하는 아이들까지도
내가 이제 고향에 가면 만나보지 못할 얼굴들이며 알아보지 못할 얼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항상 바라보고 위안을 얻으며 격려를 받던 그 하
늘만은 의연할 것을 머리에 그리며 나는 이 붓을 옮긴다.


두견산 밑에 게딱지 같은 오막살이들이 오글오글 모여 있는 그 중에서 가
장 작고 가장 낡은 집이 우리집이다. 그 집은 지은 지가 몇십 년이나 되는
지 모르나 어쨌든 벽하나 바르지 못하고 기둥 한 개 성하지 못하다. 비 오
는 날이면 기둥 썩은 냄새가 물큰하게 난다. 그러나 어머님께서 손질을 잘
하셔서 일견 새집 같고 안팎이 정결하다.


안방은 세주고 윗방에 우리 모녀가 있었다. 윗방은 더구나 천정이 얕아서
키 큰 사람은 허리를 굽혀야 들어가게 된다. 벽은 쓰다가 버린 원고용지로
바르고 뒷문 편으로 다 낡은 옷궤들이 컴컴하게 놓여 있으며 앞문 앞에는
석유상자 책상이 푸른 보에 덮여 있다. 그리고 책상 위에는 빌려온 신문들
이며 책권들이 언제나 너저분하게 널려 있다.

처마 끝에 참새들이 조잘거리고 아이들이 장난감으로 만든 듯한 앞문에 햇
빛이 따스하게 드리우면 어머님은 이엉초 걱정에 부산하시다. 그런지 며칠
후에는 기어이 이엉초를 마련해 가지고 뒤뜰에서 부스럭부스럭 소리를 내시
면서 이엉을 엮으신다.


문예란 말만 들어도 나는 입을 헤하고 벌리던 그때라 신문이나 잡지권을
애써 얻어들여 가지고는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붙잡고 있다. 어머님은 나
의 이러한 행동에 불만하셔서 항상 꾸지람을 하시며 일감을 내놓아 나로 하
여금 책을 보지 못하게 한다. 나는 간간이 어머님과 대항을 하다가도 못 이
겨서 잡히지 않는 바늘을 쥐고 일을 하는 체한다. 그러나 어머님이 밖으로
나가시면 옷감을 구석으로 밀어던지고 또다시 책을 든다. 더구나 저렇게 이
엉을 엮으실 때는 어머님이 용이해서는 방안에 들어오시지 않으므로 나는
마음을 놓고 누워서 책을 본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때야말로 눈에 비쳐지는 문구란 문구는 모를 것 밖에
는 없다 어떤 때는 책 . 한 권을 다 읽고 나도 머리에 남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재독을 한다, 삼독을 한다, 내지 오륙차를 거듭해도 점점 더 아득하
다. 나는 기가 있는 대로 치밀어서 벌떡 일어나 미친년같이 온 방을 휩쓸다
가도 못 견디어서 밖으로 튀어 나간다.


어머님은 아무 불평이 없이 만족한 얼굴로 이엉을 엮으시다가 나를 보고,
“왜 또 나오니, 좀 지접(地接)을 해서 일을 하지”
걱정스러이 나를 쳐다볼 때 나는 통곡을 하고 싶다.
“바느질이나 하면 뭘해요!”
나는 톡 쏘는 듯이 이렇게 말하면 어머니는,
“계집아이가 바느질해야지 뭘 한단 말이냐…… 어머니는 손에 피가 나도
록 일만 하는데 넌 놀려고만 하니, 너도 이젠 그만하면 셈 좀 들어라.”
어머니는 한숨을 푹 쉬신다. 나는 어머님의 저 한숨소리만 듣게 되면 언제
나 가슴이 찌르르 울리면서 마음이 죄송해진다. 그리고 어머니를 위로해드
릴 생각이 부쩍 일어난다. 나는 한참이나 아무 말 없이 섰다가 어머니 곁으
로 가서 이엉초를 한 줌씩 집어 어머니 손에 쥐어주며 약간씩 붙은 나락을
훑어서 바가지에 담는다.
“손끝이 몹시 아픈데 어디 좀 봐라.”
나는 내미는 어머니의 손을 쥐고 들여다보니 다섯 손끝에 빨갛게 피가 배
었다.
“아이 어머니, 피가 나올래. 내 좀 해 응, 저리가, 어머니는”
어머니는 쓸쓸히 웃으시면서,
“네까짓 것이 뭘하냐.”
어느덧 모녀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해진다.
“어서 들어가서 일이나 해라.”

어머니는 목이 메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부스스 일어났다.


내 눈앞에 나타나는 저 두견산, 우리 인간사회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듯
이 푸른 옷, 붉은 옷을 찬란히 입고 올라라 올라라 하늘 끝까지 푸르러……
미의 극치를 완연히 들어보이고 있다. 산 넘어 새소리 꿈같이 들려오고 미
풍에 산 향기 그윽하다. 나는 이 장관에 취하여 잠깐 섰다가 방으로 들어오
면 방안은 굴 속 같고 무슨 냄새가 코를 버티운다.
나는 겨드랑에 땀을 척척히 느끼며 앞문을 탁 열어제친다.


문이 좁아라 하고 밀려드는 저 하늘, 내 조그만 책상에 말없이 미소를 던
져주는 저 하늘, 어디서 보던 하늘보다도 밝고 다정하다. 나는 어느덧 책을
들며 ‘읽자! 쓰자!’하고 부르짖을 때 내 머리 속은 저 하늘같이 맑아지며
그렇게 푸른 희망으로 내 조그만 가슴은 터질 듯하다.
지금도 간도에 있는 나, 때때로 하늘을 우르러 내 고향을 그린다. 조그만
우리집을 푹 덮어줄 그 하늘, 문마다 가득 찰 그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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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의(秋意) - 박용철

[시시(詩時)]한 인생

秋 意[추의]
                                                                           박용철

가을의 깊은 뜻을 누가 다 알겠읍니까. 가을의 깊은 뜻을 어이 이루 말하겠읍니까. 
저 아슬히 높고 사모쳐 푸른하늘! 그것은 우리의 감각을 모조리 쓸어드리고, 우리의 
마음은 그 끝없는 끝을 찾아가려는듯이 그리로 쏠리어 갑니다.
가을 귀뜨라미 소리에 애상을 느끼는것도 아니오 가을달을 바라보고 하염없는 눈물
에 젖어본 적도 없는 마음입니다마는 이가을하늘아래에서 어인줄 모르는 그윽한 노
스타르쟈에 괴로워합니다.

노스타르쟈!그것은 고향을 그리워 파다거리는 마음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계시는 곳 
어머니의품에 안겨자라던 집이 있는곳 뛰어다니던 물과 언덕이 있는마을. 고향은 어
느때나 마음이 이세상의 물결에 부댓기어 제자리를 얻지 못할때 그리로 돌아가고 싶
어하는곳 거기는 완전한 쉬임이 기다리는줄로 여겨지는 리상의 곳입니다.
왼세계에서 가장 포퓰라하다고 할수있는 저 단순한노래 홈 스위 ― ㅌ홈 가운대있는 
『아무리 보잘것없다해도 내고향같은데없다』는 그생각은 아마 고향을 그리는 생각
가운데 가장 널리 있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마음은 어느 고향을 향해 이리도 안타까웁게 파다거리는지요. 불행히도 내 
마음 가운데는 초가집웅 가즈런한 아무 마을도없고 수수깡 울타리 둘러있는집도 없읍
니다. 내마음은 하나의 그리운 고향을 가지지 못했읍니다.
그러면서도 이리 간절한 노스타르쟈! 져 아슬히푸른하늘끝에 구름을 따라 사라지려는
듯한 마음은 무엇일까요. 이 조블 하고 악착한 세상살림에 마음 맞지 아니해서 언제나 
바다 건너로 달리는 방낭의 손이 있기는 있다 합니다. 그러나 나의 소심한 마음은 날마
다 낯서툴은 땅에서 새로운 모험을 차즘으로 질검을 삼는 방낭의 아들은 아닙니다.

고향이 없는 향수, 돌아갈 곳이 없는 노스타르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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