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팡이 하나 - 고한승
[시시(詩時)]한 인생지팡이 하나
고한승
옛날에 우리나라 유명한 양반으로 팔도어사를 지냈던 박문수란 분이 있었
습니다. 그분이
조선팔도를 돌아다니면서 별별 기괴한 일을 많이 당하였는
데 그중에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지요.
하루는 어느 시골 길을 혼자서 터벅 걸어가다보니까 저쪽에 어떤 사람 하
나가 헐떡거리고
옵니다.
그러더니 그 사람이 박문수 박어사를 보고
“내 뒤에 도적놈이 칼을 들고 쫓아오니 나를 좀 숨겨주십시오.”
하고는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길가에 있는 보리밭 속으로 들어가 숨어버렸
습니다.
도량도 넓고 꾀도 많은 박어사라도 창졸(倉卒) 간에 이러한 일을
당하니
까 어떻게 할지 앞이 캄캄하였던 모양이었습니다.
그러더니 미처 생각도 못해서 저편 고개 너머로 과연 흉악하게 생긴 도적
놈이 시퍼런 칼을
들고 쫓아옵니다.‘아- 이것 큰일났다’하고 생각하는 사
이에 벌써 도적이 앞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상기된 눈을 두리번하면서
‘너
이리로 사람 하나 지나간 것 못 보았느냐?’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박어사는 어쩔 줄 모르다가 얼른 대답한다는 것이‘못
보았습니다’하였
습니다.
도적놈은 눈을 크게 뜨면서‘이놈 못 보다니. 길이 이것 한 갈래밖에 없
는데 못 봐! 네가 그놈을
숨겼구나. 바로 대지 않으면 너부터 죽인다’하고
는 칼을 들어 단번에 찌를 것같이 으르렁댔습니다.
자- 큰일났습니다. 모른다고 하면 자기가 죽을 모양이고 가르쳐주면 그
사람이 죽을 모양이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합니까? 그렇다고 도적과 대항하여
싸우자니 자기의 손에는 지팡이 하나뿐이고 도적은 시퍼런 칼을 들고 있지
않습니까?
더욱이 자기는 임금님의 명령을 받아 팔도로 순회하여 민정을 보
살피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책임을 진 어사의 몸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
이 손을 들어 보리밭을 가리켜주고는 그대로 도망을 하였습니다. 물론 보리
밭 속에 숨었던 사람은 무지한 도적의 손에 죽었을
것입니다.
그날 밤에 박문수 박어사는 어떠한 글방을 찾아가서 하룻밤을 새게 되었
습니다. 글방에는
나이가 열두어 서너 살쯤 된 어린 사람들이 십여 명이서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박어사는 글방에서 저녁을 얻어먹고 윗목에 가서 곤
한
다리를 쉬느라 드러누웠습니다. 온종일 걸어서 몸이 피곤하여 한잠을 곤
하게 자려고 하였으나 아까 낮에 자기의 어리석음으로 보리밭 속에서
죽은
그 사람의 일을 생각하니 잠이 도무지 올 리가 있습니까?
자기는 어사의 몸으로 고생하는 백성을 살려주어야 할 사람이어늘 애매한
사람을 죽게 하였구나!
어떻게 하면 그 사람도 살리고 나도 살았을까? 이러
한 생각을 하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고 있는데, 마침 그때 글방 선생님
이
동네로 놀러나가는 모양이었습니다. 자- 선생이 나가니까 여러 글 읽는
학도들이 책을 일제히 척 덮어놓고는“놀자!" 하고
일어섰습니다.
그랬더니 그중에 한 학도가 하는 말이 “얘 오늘은 원님놀음을 하자!”
하니까 여러
소년들이“그래 그것 좋다”하더니 그중에 제일 똑똑해 보이는
소년을 원님으로 정해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원님으로 천거된 소년이 아주
점잖은 목소리로 누구는 이방을
내고 누구는 통인을 내고 누구는 사령을 내고- 이렇게 차례와 분부를 하여
놉니다. 그리고
원님행차하신다고‘이럭거라 물렀거라’하면서 안방에서 마
루로 마루에서 윗방으로 돌아다닙니다.
박문수 박어사는 윗목에 누웠다가 하도
우습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여
‘어디 어떻게 뭘 하나 꼴을 좀 보자’하고 자는 체하고 코를 드르렁 골았
습니다.
그랬더니 원님행차가 앞으로 지나가다 말고 우뚝 서서 원님이 이방을 불
러 호령을 합니다.
원님행차가 지나가시는데 웬 사람이 코를 골고 누웠단
말이냐? 빨리 잡아오너라. 하니까 이방과 사령이 일제히 대답을 하고는 박
어사를
잡아 일으킵니다.
여러분! 장난으로 원님놀음을 하는데 아무리 거지같이 차리고 다니는 사
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어른이 아닙니까? 그리고
이 글방에도 손님으로 들어
와서 자는 중입니다. 그런데 어른이요 손님인 박어사를 자기네의 장난놀음
에 버릇없는 놈이라고 잡아가는
그들의 의기와 기운이 어떠합니까? 자- 잡
혀갈 박어사도 가만히 생각을 하니까 참말 그 소년들의 마음과 뱃심이 꽤
크더란 말이지요.
그래서 어찌하나 볼 양으로 잠자코 잡혀갔습니다.
박어사의 무릎을 꿇어놓고 원님은 높은 데 올라앉아서 일장호령을 내립니
다. 열두어 살쯤 된
소년이 앉아서 점잖은 어른에게 호령을 하니 참말 우스
운 장난이었습니다. 그러나 박어사도 원래 마음이 큰 분이라 잠자코 앉아서
“제발
잘못하였으니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하고 빌었습니다. 그러니까
원님이 노여움이 겨우 풀려 “네가 처음이요 또 법을 모르는 무식한
자기로
이번만은 용서하여주겠으니 이후에는 각별히 조심을 하여라”합니다.
박어사는“네, 그저 감사합니다”하고 절을 꾸벅 하고는 가만히
생각하기
를‘이 소년들이 이같이 영리하고 도량이 크니 반드시 이다음에 큰 사람이
되리라’하고 오늘 당한 일을 한번
물어보았습니다.
“어떤 길 가는 사람이 이러이러하여 그 사람을 죽게 하였으니 어떻게 하
면 두 사람이 다-
살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박문수 박어사가 아직까지 생각하고 생각하되 종시 생각이 나
지 않는 이 문제로 물어본
것이었습니다.
원님이 가만히 팔짱끼고 한참 생각하더니
“예끼! 못난 사람! 그것을 못 살려!”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아-니 길을 가는 사람이니 지팡이를 짚었겠지?”
“네- 지팡이야 가졌지요. 그러나 도적은 칼을 가졌으니 어떻게
대항합니
까!”
그 소년이 깔깔 웃으면서
“하하 저런 못난 사람 좀 봐!
지팡이를 가졌으면 장님 노릇을 하고 가지
못해?”
하였습니다.
어떻습니까? 과연 지팡이를 짚고 장님 노릇을 하고 갔으면 아무도 지나간
사람을 못 보았다고
할 수가 있었지요.
박문수는 무릎을 탁! 치고 참말 절을 한번 하였습니다.
팔도 도어사로 이름 높고 꾀와 재주가 많은 박문수란 분도
이름 모르는
소년 앞에서 비로소 참 마음으로 감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영리한 소년은
물론 박어사가 잘 출세를 시켜서 훌륭한 인물이
되었겠지요.
-《어린이》제3권 제9호, 1925.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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